기획특집

[기획] 심리적 문턱을 낮추는 일상 속 정책과 디자인
작성일:
2023-04-19
작성자:
소식지관리자
조회수:
1308

[기획] 디자인을 통한 인지건강 가이드

공공디자인 소식지 제30호(2023.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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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문턱을 낮추는 일상 속 정책과 디자인


어느 날 현관문을 나섰는데 보행로와 차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고 마트 입구 앞 까만 발판이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진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인지능력이 저하되었을 경우 이처럼 시공간 판단 능력, 주의력 등을 흔들며 나아가 기억력, 정신운동 속도, 언어능력, 계산능력 등을 무너뜨리는 특징이 있다. 이는 개개인의 선천적인 특성, 신체 발달 정도, 후천적 감각 감퇴 등으로 비롯되기에 단순히 노화 증상이라 미뤄두기에는 사회적으로도 마땅하지 않다. 세계적으로 시민의 인지건강을 위하는 측면에서 행동 유도성 디자인*, 색채 디자인 등을 고도화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이유다. 

물론 가까이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초등학교 앞 어린이 통학로를 가리키는 옐로우 카펫 디자인은 보행로에 대기하고 있는 어린이를 눈에 잘 띄게 해 어린이 이용자 62.1%가 안전하다, 보호받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했다. 고속도로의 갈림길 유도선 세이프티 레인 디자인의 경우도 운전자에게 상황을 빠르게 판단할 근거를 제공해 해당 유형의 사고를 27%나 줄였다. 즉 ‘원활하게 정보를 잘 파악할 수 있다’란 가치는 개인의 생활안정과 사회적 안전과도 연결되므로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인지능력과 건강에 도움을 주는 디자인을 더욱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밖에도 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이끈 디자인 정책과 프로젝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행동 유도성 디자인이란 단어 그대로 사용자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디자인을 말한다. 사물 또는 환경 그 모습 자체로 사용자가 작동의 기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기본적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미국의 지각심리학자 제임스 J. 깁슨(James J. Gibson)이 1977년에 최초로 ‘행동 유도성(affordance)’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 편집자주



누구나 입구와 출구를 즉각 인지할 수 있도록

LH의 수원 호매실지구 공공주택

도시의 지속 가능성을 위하는 실천으로 광교신도시 조성 등 대규모 개발사업 시 공공디자인을 도입하고 있는 경기도. 그중 수원 호매실지구에 지어진 LH(한국토지주택공사) 공공주택 4단지(980세대)는 2020년 6월 기준 LH 최초로 색채 유니버설디자인을 도입한 프로젝트라 눈길을 끌었는데, 그 도입 배경에는 한글을 알지 못하는 거주자도, 시력저하를 겪고 있는 거주자도 쉽게 공간을 감각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즉 개개인마다 대상을 인지하는 폭과 정도가 다른 만큼 모든 사람들이 정확한 정보를, 특히 안전을 위한 정보를 어려움 없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공공성 측면에서 색채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주동 주출입구, 층별 엘리베이터홀 등을 비롯해 주차장의 비상탈출로나 교차로, 보행로 등 보행자의 안전과 직결된 영역들이 디자인 대상이 됐다. LH는 “공공주택 색채 유니버설디자인 가이드라인에 따른 시범사업”이었음을 알리며 “점차 확대 적용해갈 것”이라 소식을 알렸다.

  

LH는 ‘이용자 관점에서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색채디자인을 도입했다고 밝혔다.LH는 ‘이용자 관점에서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색채디자인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출처 : LH 블로그


공공시설 리모델링으로 먼저 시범을 보인 

영국 커클리스의회

영국의 커클리스의회(Kirklees Council)는 DSDC(Dementia Services Development Centre)가 제작한 ‘노화 및 중증 인지장애 환경 설계 평가 도구(Environments for Aging and Dementia Design Assessment Tool, EADDAT)’의 지침에 따라 지역 내 건물을 점검하고 인지장애 예방을 위한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다. 이들은 “건물이나 공공장소에서 잘못 선택하여 발생하는 불편함이나 시간적, 감정적 소비보다 인지 친화적인 페인트나 바닥재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한다. EADDAT 지침은 모두를 위한 일상용, 가정이나 기관용, 도시개발 및 공공의료 보건 전문가용 3단계로 구분되며, 현재 3단계는 개발 중이다. 

커클리스의회는 이 지침에 따라 지역 내 공공주택을 분석하고 개선했다. 예로, 단색 벽은 여러 실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벽에 붙은 사이니지가 조명이나 햇빛을 반사하거나 천장에 붙어 있어 쉽게 식별하기 어려웠다. 이에 실마다 현관 색깔을 달리하면서 벽에 숫자를 크게 썼고, 여러 유형의 간판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문구를 단순화하고 아이콘을 더해 가독성을 높였다. 바닥면에 생기는 그림자 대비를 줄이기 위한 조명 계획도 더해졌다. 프로젝트 담당자의 회고를 아래 링크에서 들을 수 있다.(https://youtu.be/easY9B08YqI) 이들은 인지장애 예방을 위한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포괄적 디자인이란 해설도 덧붙였다.

 

EADDAT 지침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되며, 특히 2단계는 장소 유형별로 7가지 환경을 나눠 인지 디자인 지침을 소개한다EADDAT 지침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되며, 특히 2단계는 장소 유형별로 7가지 환경을 나눠 인지 디자인 지침을 소개한다. 사진 출처 : DSDC

   

커클리스의회는 색의 대비, 다른 재료 사용, 조명 활용 등을 통해 건물의 사용자가 쉽게 환경을 인지하도록 공간 디자인을 개선하고 있다. 커클리스의회는 색의 대비, 다른 재료 사용, 조명 활용 등을 통해 건물의 사용자가 쉽게 환경을 인지하도록 공간 디자인을 개선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유튜브 채널 dementiacentre



일상에서 인지력 트레이닝을 유도하는 

일본 쇼핑재활 프로젝트

나이가 들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오랜 시간 움직이는 것이 부담스러울지라도 마지막 보루는 있으니 그중 하나가 생필품을 구매하는 슈퍼이고 마트이다. 이에 일본 시마네대학교 커뮤니티의료관리학부와 운난시병원은 노인의 신체 및 인지 저하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쇼핑 재활’ 연구를 실시했다. 운난시에서 가장 큰 마트 마르체리즈에서 열린 본 실험은 평균 연령 86.32세 노인 72명과 이뤄졌다. 먼저 마트에 도착해 30분간 치료사의 동행 하에 팔을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수 카트를 밀며 사고자 하는 물건을 직접 고르고 카트에 넣는 식으로 쇼핑했고, 이후 1시간 다목적홀에서 체조한 다음 다시 30분간 쇼핑하는 120분 코스였다. 연구 보고서는 “6개월 실험 결과 일상생활, 운동기능, 영양상태, 구강기능, 인지기능 등 7개 영역에서 고루 체크리스트 점수가 향상됐다”고 말하며 “노인들은 종종 가족의 도움을 받으므로 혼자 쇼핑할 기회를 잃는다. 하지만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신체 및 인지기능을 지킬 수 있으니 이들의 쇼핑을 지원하거나 관련 도구를 개발해 독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쇼핑 등 늘 해오던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인지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쇼핑재활’ 연구쇼핑 등 늘 해오던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인지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쇼핑재활’ 연구. 사진 출처 : shopping-reha



이에 덩달아 보이는 것이 식품 시장이고, 식품의 정보를 담는 패키지 디자인이다. 예컨대 2008년부터 꾸준히 성장가도를 그리고 있는 일본의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Universal Design Food) 인증 제도를 보자. 이 제도는 음식의 강도나 점도에 따라 씹기 쉬운 정도, 잇몸으로 으깨지는 정도, 혀로 으깨지는 정도, 씹지 않아도 되는 정도 4단계를 구분한다. 자연히 상품 패키지 디자이너는 매대 앞에 서 있는 소비자들에게 이러한 제품의 특성을 잘 전달해야 하는 과제를 안는다. 기업 큐페이의 경우 상단에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 마크를 달고 눈에 잘 띄게 손잡이 부분에 단계 이름을 명시하고 색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지장애 예방을 위한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상점이란 공공 공간부터 일상의 재화까지 새롭게 연구할 지점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니버설 디자인 푸드 마크와 기업 큐페이의 패키지 디자인유니버설 디자인 푸드 마크와 기업 큐페이의 패키지 디자인. 사진 출처 : 큐페이



감정을 치유하는

영국의 사회적 처방

돌봄 경로 다각화는 인지건강 지원 정책에서 단골 개념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정신적, 정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지역 주민(환자)에게 약물 처방 대신 비약물적 도움을 제공해 개인의 건강과 복지를 높이는 사회적 처방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노화로 인한 인지장애의 경우 심리적 부담감과 우울감이 증상을 악화시키므로 감정의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지역거점 의료기관 GP(General Practice)를 비롯해 약사 등 의료인이 진단하며, 지역의 사회적 처방 활동가를 연계하는 식으로 처방이 내려진다. 링크 워커(link worker), 서포트 브로커(support broker), 커뮤니티 네비게이터(community navigator) 등으로 불리는 활동가들은 주민과 만나 대화하고 공감하는 정서적 교감 외에도 미술, 원예, 운동 등의 작은 활동들을 실시해 환자의 치료를 돕는다. www.healthcareers.nhs.uk

 

링크 워커는 현관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인지장애 및 우울증 주민들의 손을 잡고 지역 사회로 당겨와 사회와건강과 웰빙을 엮는 역할이다.링크 워커는 현관 문턱을 넘기 어려운 인지장애 및 우울증 주민들의 손을 잡고 지역 사회로 당겨와 사회와건강과 웰빙을 엮는 역할이다. 사진 출처: NHS


집도 변신이 필요하다고 안내하는 

호주의 중증 인지 장애 환자의 자립 환경 프로젝트

호주는 인지장애의 대표적 질환인 치매와의 오랜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12년 국가건강우선순위에 치매를 포함한 후로 보건당국의 자문단 그룹과 실무진 구성, 치매 환자 가족들에게 교육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담 기구 조직, 국가 이니셔티브 출범 등을 해온 것이 그 증거다. 목표는 하나. 인지장애를 겪는 이들이 가능한 한 완전하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최근 발표한 ‘치매 자립 환경 프로젝트(Dementia Enabling Environment Project)’는 집, 돌봄시설, 공공시설, 병원, 정원의 영역에서 인지환경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디자인 방법론을 시민에게 무료 배포(www.enablingenvironments.com.au)하는 프로젝트였다. 색, 패턴, 재료, 조명, 소리 환경까지 일상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낱낱이 분석하고 인지장애 환자에게 더 나은 환경이란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알린다. 이를 통해 시간과 방향 감각을 쉽게 알아차리고, 안전한 공간적 독립성을 확보하는 디자인을 누구나 따라해볼 수 있도록 한다.


치매자립 환경 프로젝트 10원칙

삶의 방식을 구현한다.

휴먼 스케일을 반영한다.

움직임, 참여 및 의미를 촉진한다.

자연을 즐길 기회를 준다.

자극을 최적화한다.

안전조치를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볼 수 있게 한다.

친숙한 장소를 만든다.

혼자 또는 같이 어울릴지 선택할 기회를 제공한다.

지역 커뮤니티에 연결한다.

 

인지장애 환자에게 안전한 건축유형별, 공간별 디자인 방법론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인지장애 환자에게 안전한 건축유형별, 공간별 디자인 방법론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호주 치매자립 환경 프로젝트



식사는 모두가 할 수 있어야 한다, 잇웰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대만의 산업디자이너 샤 아오(Sha Yao)가 개발한 제품 잇웰(Eatwell)은 인지, 운동,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주 이용자로 설정하고 만든 식기 세트다. 사진을 보자마자 알 수 있듯이 식판과 식기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빨강, 파랑, 노랑 등 채도 높은 원색을 적용했고, 식기 안 음식물의 모습과 양을 바로 알 수 있도록 그릇 바닥에 경사를 뒀다. 머그 손잡이처럼 식판에 손잡이를 둔 것도 특징이다. 치매를 앓은 할머니를 떠올리며 디자인했다는 디자이너는 “나이가 들수록 식사가 일상에서 가장 도전적인 과제임을 깨달았다. 식사는 모두에게 가장 쉬워야 한다.”고 디자인 의도를 밝혔다. 

종합하면 부엌, 마트, 도서관 등 한 개인의 일상적 공간 단위에서 일어나는 보행, 식사, 결정 등 다양한 행위를 구분하고 해석하는 지점부터 인지장애를 예방하는 디자인의 실머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www.eatwellset.com


식판, 식기, 음식물 등 각 요소를 구별하기 쉽도록 제품의 색, 모양, 크기 등을 정했다.식판, 식기, 음식물 등 각 요소를 구별하기 쉽도록 제품의 색, 모양, 크기 등을 정했다. 사진 출처: 잇웰



글: 윤솔희, 담당: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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