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작성일:
- 2022-06-28
- 작성자:
- 소식지관리자
- 조회수:
- 1535
[기획] 국내외 생활골목길 디자인 사례
공공디자인 소식지 제20호(202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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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고유의 색으로 빚은
생활골목길 디자인
집, 슈퍼, 빵집, 미용실 등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골목길은 복잡하기 보다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이웃이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마주서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골목길은 그 장소 자체가 동네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이에 골목은 지역 주민의 소통과 놀이의 공간으로서 사회적, 문화적, 공동체적 성격과 더불어 지역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생활골목길을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허물고 밀어내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역사를 존중하며, 골목길 자체를 브랜드로 만든 국내외 사례를 소개한다.
지속 가능한 공생 프로젝트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 마을
봉제거리, 절벽마을 등으로 불리는 창신동은 2014년 도시재생 사업 1호로 유명한 곳이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창신동의 노후 주택 비율은 72.2%(2017년 기준)로, 성북구 정릉동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역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은 건물이 한데 모여 있고 길은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좁고 가파르고 굽이졌다. 하지만 주거 지역으로는 불편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는 곳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창신동 봉제 마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브랜드로 성장시킨 ‘공공공간’의 활동이 알려지면서부터 시작된다. 2012년 미술을 공부한 사회적 기업가 신윤예가 만든 공공공간은 ‘메이드 인 창신동’이 브랜드로 인정받고 수익이 봉제 마을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간판이 없어 공장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골목의 간판을 정비하고, 봉제공장에서 나온 자투리 원단을 담아 방석을 만들며, 봉제공장 사장님들과 협업해 자투리가 나오지 않는 제로웨이스트 디자인의 패션 브랜드도 론칭했다. 특히 창신동 봉제 마을은 골목길이 흥미로운데, 창신동에 숨어 있는 역사 공간과 봉제공장 등의 정보를 정리한 지도를 만들어 도슨트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2021년에는 신현길 아트브릿지 대표가 봉제 마을 한편에 ‘뭐든지 하우스’를 세워 문화의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책방, 소극장, 예술학교, 공유 오피스, 셰어 하우스 등이 있는 뭐든지 하우스는 봉제공장 사장님들의 자녀가 안전하고 안락하게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자 창신동에 관심 있는 문화·예술 관계자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공공공간이 만든 창신동 골목 투어 앱과 마을 지도. 사진 출처: 공공공간 홈페이지 www.000gan.com
공공공간이 진행한 창신동 봉제 마을의 간판 정비 프로젝트. 각 공장의 특기를 알아보기 쉽게 그림을 함께 넣었다.
사진 출처: 공공공간 홈페이지 www.000gan.com
공공공간이 봉제공장에서 쓰고 남은 자투리 원단을 모아 만든 방석과 패션 브랜드 제로웨이스트 디자인.
사진 출처: 공공공간 홈페이지 www.000gan.com
2021년 신현길 아트브릿지 대표가 문을 연 뭐든지 하우스. 사진 출처: 뭐든지 SNS www.instagram.com/mordeunji
세대를 넘어선 커뮤니티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청춘발산마을
광주광역시 서구 양3동에 있는 발산마을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일산방직과 전남방직 등의 직원들로 인해 활기를 띠는 동네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방직공장의 쇠퇴와 함께 마을의 여공들이 떠나며 광주의 대표 달동네로 남게 된다. 세월이 좀 더 흐르자 지방 공동화로 발산마을에는 빈 집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15년 현대자동차그룹과 공공미술프리즘이 광주광역시와 서구청, 기아자동차 광주 공장, 광주창조경제혁신센터와 만 4년간 공들여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공들로 활기를 띠던 당시의 마을을 그리워하는 어르신들의 바람을 담아 이름은 청춘발산마을이 되었다. 청춘발산마을 프로젝트의 모토는 ‘주민들의 일상이 마을의 경관’이다. 외형을 정비하는 것뿐 아니라 발산마을 본래의 모습과 정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겠다는 것이다. 4년간의 재생 사업이 끝난 후 프로젝트의 매너지였던 송명은은 발산마을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 터를 잡고 청춘발산협동조합을 만들어 어르신들과 꾸준히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마을을 가꾸고 있다. 기획자나 청년이 마을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민 스스로 마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마을 변화의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최근에는 생활문화공동체 지원 사업을 통해 골목이웃회를 만들고 주민들이 모여 마을 얘기를 하고, 도시락도 나누고, 폐품을 팔아 행복장학금도 만들었다.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젊은 예술가들이 입주해 카페, 빵집,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으며 젊은 부부가 아이와 함께 살 집을 이곳에 새로 짓기도 했다. 기업의 지원 사업이 끝난 지금까지도 마을에서는 어르신들과 새로 입주한 청년 활동가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며 깨끗하고 재미있는 마을이 지속되고 있는 흔치 않은 골목 재생 사업으로 손꼽힌다.
발산마을의 소식지 <골목 브릿지>. 사진 출처: 청춘발산협동조합 www.bal-san.com
발산마을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만든 굿즈. 사진 출처: 청춘발산협동조합 www.bal-san.com
청춘발산마을 중심에 있는 사무국. 사진 출처: 청춘발산마을 SNS www.instagram.com/balsanvillage
청춘발산마을의 108 계단을 중심으로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뉜다. 사진 출처: 청춘발산마을 SNS www.instagram.com/balsanvillage
오래된 아파트를 더 의미 있게 만든 새 공간
서울시 중구 중림동 성요셉아파트 골목길
서울역 뒤 중림동에 있는 성요셉아파트는 1971년 6월에 완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다. 성요셉아파트와 함께 있던 중림시장은 경성수산시장으로 불리던 큰 시장이었지만 노량진과 가락동에 거대한 수산시장이 생기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 시장이 번창할 당시 상인들이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얼기설기 지었던 아파트 맞은편의 창고도 버려진 공간이 돼버렸다. 창고는 10년 이상 동네의 흉물로 남아있다가 2018년 서울로 주변 도심재생사업의 대상지가 되면서 재건축된 후 2019년 11월에 ‘중림창고’라는 새 이름을 얻고 재창조됐다. 4m의 언덕길을 사이에 두고 성요셉아파트와 마주한 중림창고는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필요로 자연스럽게 경계가 둘쑥날쑥해진 길의 이미지를 반영해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건물을 반듯하게 짓지 않고 높이마다 모두 다른 형태로 지은 점도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면 긴 건물 전체가 개방된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높은 공간과 낮은 공간, 2층으로 연결된 공간, 외부와 연결된 공간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건물의 특징을 살려 사람들이 거리를 걷다 언제든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1층의 전면을 개방한 것도 공간 설계의 포인트다. 현재 중림창고는 서울도시재생사회적협동조합이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 복합문화공간으로 전시, 판매, 문화 활동을 하는 공간이자 서울로7017을 통해 구도심을 산책하는 루트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주민이 함께 운영하는 골목 책방이 문을 열어 지역공동체가 스스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작은 발판을 마련했으며 외지인의 적극적인 참여도 이끌어내는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요셉아파트 거리와 마주하며 이질감 없이 들어서있는 중림창고. 사진 출처: 중림창고 서점 여기서울 149쪽 SNS www.instagram.com/here.149p
중림창고의 외관과 내부. 사진 출처: 서울 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 www.seoulcrc.com
세계에서 하나뿐인 골목길 네트워크
일본 도쿄 야나카의 분산형 숙박 서비스
‘하기’라는 싸리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던 도쿄 야나카에는 동네의 특징을 담은 이름의 작은 목조 아파트 ‘하기소’가 있었다. 1955년 문을 연 하기소는 야나카에 캠퍼스를 둔 도쿄예술대학 학생들의 자취집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2011년, 하기소는 시설의 노후화로 해체될 운명에 처했다. 이곳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많은 작가들이 하기소의 소식을 전해 듣고 아쉬운 마음에 자신들의 작품을 모아 ‘하기엔나레 2012’라는 이벤트를 열었는데, 2주 동안 열린 이 이벤트에 1500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이러한 사람들의 관심은 하기소의 운명을 바꿨다. 건축가 미야자키 미츠요시는 학생들과 함께 하기소를 동네의 북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하기 아트’와 카페 ‘하기 카페’를 오픈했다. 전문 큐레이터가 엄선한 작품이 지속적으로 전시되고 춤과 음악, 공연, 워크숍, 영화 상영 등으로 공간이 활용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즐겨 찾는 복합문화시설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은 점점 쇠퇴하고 빈집이 증가했다. 지역은 피폐해지는데 하기소만 북적이는 이질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건축가 미야자키 미츠요시는 분산형 숙박시설을 야나카 지역에 도입해 지역 전체를 숙박시설, 문화시설 등의 융합 공간으로 만들었다. 호텔은 마을의 오래된 집을 개조했고 호텔 내 사우나가 없는 대신 동네 목욕탕 이용권을 주었으며 레스토랑이 입점하는 대신 동네 맛집 지도를 제공하는 것이 이 마을 호텔의 특징이다. 웹사이트를 살펴보면 호텔 리셉션인 하기소를 비롯해 전통문화 체험 공간, 목욕탕, 식당 등을 동그라미로 묶어 호텔을 소개하는 것만 보더라도 이 호텔의 의의를 알 수 있다. 투숙객은 이곳에 머물며 자연스럽게 동네를 탐방하고 주민과 소통하며 일반 호텔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과 서비스를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숙박객들이 체크인부터 체크아웃하기까지 움직이는 동선과 소비가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민간 주도의 자유로운 발상, 인근 대학인 도쿄예술대학교와의 오랜 관계에서 형성된 콘텐츠가 좋은 시너지를 만들고 있다.
하나레 호텔의 리셉션인 하기소의 외관과 라운지. 사진 출처: 하나레 홈페이지 hanare.hagiso.jp/en/
하나레 호텔의 객실과 세면실. 사진 출처: 하나레 홈페이지 hanare.hagiso.jp/en/
하나레 호텔과 연계된 공중목욕탕과 카페. 사진 출처: 하나레 홈페이지 hanare.hagiso.jp/en/
하나레 호텔과 연계된 인력거 서비스와 자전거 렌탈 숍. 사진 출처: 하나레 홈페이지 hanare.hagiso.jp/en/
조금씩 천천히 주민이 자발적으로 바꾼
영국 리버풀 그랜비 포 스트리트
한때 영국 리버풀의 번화가였던 그랜비 스트리트는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다양한 인종이 살며 활력이 넘치는 거리였다. 그러나 대량 실업과 가난에 1981년 폭동까지 일어난 후 정부는 재개발을 위해 대대적으로 주택을 구매했다. 그랜비 스트리트의 주요 네 개 거리를 제외한 나머지 구역의 집들이 모두 철거되었고 대부분의 주민이 떠났지만,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캠페인 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결국 그랜비 포 스트리트 커뮤니티 랜드 트러스트(Granby Four Streets Community Land Trust)라는 주민토지신탁을 결성했고, 2010년 전문적인 도시 재생가를 영입하고자 어셈블 스튜디오에게 의뢰했다. 약 20명의 멤버들이 수평적 협업 형태를 유지하는 건축가 그룹 어셈블 스튜디오는 낙후된 거리를 살리기 위해 우선 주민들과 정원을 가꾸고, 거리를 청소하고 황폐해진 벽에 그림을 그려 활력을 불어 넣고자 했다. 마을을 살리기 위한 주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한 독지가를 움직이게 했고 그의 후원금으로 그랜비 포 스트리트의 개발계획 인허가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미 많은 빈집이 있었고 상당수가 파손되어 있는데다 당장 이를 수리할 수 있는 돈은 없었다. 결국 마을 주민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며 함께 수리를 해나갔다. 주민들과 함께 현장에서 폐자재를 주워 재활용하고 파손이 너무 심한 집은 다시 수리하기보다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수리된 집은 기존 주민들의 자산이 되었고 공간 임대를 통해 들어온 수입으로 다음 집을 수리하는 식으로 5년간 총 10개의 집을 고쳤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어셈블 스튜디오는 그랜비 포 스트리트 프로젝트로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하며 주민들에게 자부심을 선물했다. 또한 어셈블 스튜디오는 그랜비 스트리트에 그랜비 워크숍을 만들어 주민에게는 커뮤니티 공간을, 어셈블 스튜디오에게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메이킹 스페이스로 쓰고 있다. 여기서 주민들은 부서진 돌과 벽돌로 벽난로나 테라코타 가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으로는 타일과 그릇, 컵 등을 만들어 판매하며 수익을 내기도 한다. 그랜비 워크숍에서 자체 제작한 타일이 런던 지하철 공사에 제공되기도 했다고. 거리를 되살리고자 한 주민들의 남다른 노력과 자발적 참여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했다.
그랜비 포 스트리트가 재개발되기 전 마을 풍경. 사진 출처: 어셈블 스튜디오 홈페이지 www.assemblestudio.co.uk
어셈블 스튜디오가 리노베이션한 그랜비 포 스트리트의 집 전과 후. 사진 출처: 어셈블 스튜디오 홈페이지 www.assemblestudio.co.uk
그랜비 포 스트리트의 조경 공사 후 모습. 사진 출처: 그랜비 포 스트리트 홈페이지 www.granby4streetsclt.co.uk
주민들이 주최가 되어 이끌고 있는 플리마켓. 사진 출처: 그랜비 포 스트리트 홈페이지 www.granby4streetsclt.co.uk
어셈블 스튜디오가 만든 그랜비 워크숍에서 주민들이 만들어 판매하고 있는 제품. 사진 출처: 그랜비 워크숍 SNS www.instagram.com/granbyworkshop
글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