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작성일:
- 2025-06-05
- 작성자:
- 박은영
- 조회수:
- 222
[기획] 문화 다양성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공공디자인 소식지 제55호(20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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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이주민과 문화적으로 소통하는 방법
박물관이 유물을 보관하는 장소 이상으로 지금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다국적 사람들을 도시의 구성원으로 끌어안고 함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박물관이 일조할 수 있을까? 일찍이 이 질문과 맞닥뜨리고 해결점을 모색하는 곳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독일의 베를린 박물관 섬(Museuminsel)을 중심으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는 프로젝트 ‘뮬카타: 만남의 장소로서의 박물관(Mulkata: Museum as Meeting Point)’이다. ‘뮬카타’는 아랍어로 ‘만남의 장소’라는 뜻. 베를린 이슬람 미술관(Museum für Islamische Kunst)의 슈테판 베버(Stefan Weber) 관장은 베를린으로 건너온 난민과 이주민들이 박물관에서 문화적 유산을 매개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모색할 수 있도록 뮬카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는 베를린 이슬람 미술관에서 주도하는 ‘시리아 문화유산 이니셔티브(Syrian Heritage Initiative)의 일환으로 시리아 전통 문화의 기억을 이어가면서도 유럽 사회 속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실험하는 시도였다.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다문화적 삶의 조건을 새롭게 설계하고, 공존의 장을 만들어가는 이 실험은 '커뮤니티 디자인'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접근이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 내의 이슬람 미술관과 고대 근동 박물관(Vorderasiatisches Museum), 독일 역사 박물관, 보데 박물관(Bode Museum) 등 주요 국립 박물관이 뮬카타 프로젝트에 동참하며 박물관이 공동체의 새로운 거점이 되는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뮬카타의 전시 해설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도슨트 방식과는 다르다. 난민과 이주민 등이 박물관 가이드로 참여하고 각자 선택한 유물과 주제를 바탕으로 본인의 문화적 기억과 관점을 투어 안에 녹인다. 따라서 일방적인 해설이 아닌 관람자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투어가 구성되며 박물관을 문화적 소통과 공존의 자리로 전환시킨다. 베를린 박물관 섬에 있는 각각의 전시관은 고대와 현재, 유럽과 중동, 종교와 민속, 전쟁과 재건이라는 키워드를 관통하며 관람자에게 깊이 있는 사유를 유도한다. 난민과 이주민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존중받고 고향의 유산이 박물관 중심에 존재한다는 경험을 통해 시민성과 공동체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문화적 거점으로서 박물관을 재구성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도시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관계를 설계하는 커뮤니티 디자인과 맞닿아 있다. 박물관이 ‘보는 곳’을 넘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곳’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문화는 누구에게나 열린 언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뮬카타.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뮬카타와 함께해 온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샌디 알바리(Sandy Albahri)에게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박물관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
뮬카타 프로젝트는 어떤 배경과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나요?
2015년 시리아 출신 난민의 대규모 유입에 대응하기 위해 베를린 이슬람 미술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이주 경험이 있거나 난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박물관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랍어로 진행되는 무료 가이드 투어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투어가 특별하고 의미 있었던 이유는 가이드들을 포함한 모든 팀원이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각기 다른 교육 배경을 지닌 이들이 가이드로 참여하면서 박물관에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단순한 박물관 관람을 넘어 대화, 교류, 문화 간 이해가 이루어지는 환대의 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베를린 박물관 섬의 중심이 되는 페르가몬 뮤지엄. 중동과 헬레니즘 문화의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뮬카타가 시작된 이슬람 박물관이 이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며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개방해 2037년에 완료할 계획이다. 사진: Tom Schulze 2018 ©asisi
프로젝트 초기 설계와 실행을 이끈 핵심 가치와 철학이 궁금합니다.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참여자의 모국어로 투어를 제공하는 것. 둘째는 무료 투어로 진행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별도의 사전 등록 없이 참여 가능하도록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특히 이 투어는 단순한 설명 중심의 관람이 아니라 문화 간 대화를 중심으로 한 ‘상호작용적 경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참여자들에게 인상적인 경험을 선사했고 뮬카타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난민들을 박물관의 가이드이자 스토리텔러로 참여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선정했으며, 함께 작업한 과정은 어땠는지요?
뮬카타에 참여한 가이드들이 모두 난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뮬카타의 독특한 취지에 공감했습니다. 참여 과정은 여러 박물관에서 진행되는 가이드 투어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각 가이드가 자신이 가장 관심이 가는 박물관, 컬렉션, 전시물을 직접 선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투어를 구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각 박물관에서 집중적인 교육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전시와 해설을 공동으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은, 다양한 관점이 만나는 커뮤니티를 함께 디자인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가이드들의 배경이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어떤 기준으로 전시를 선택하고 투어를 구성하는지 지켜보는 과정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고데 이집트부터 비잔틴 시대, 르네상스 시대까지 방대한 유물을 보유한 보데 박물관에서 뮬카타 가이드와 함께 탐구하는 모습. 사진: Maximilian Gödecke ©Staatliche Museen Berlin, Museum für Islamische Kunst
베를린 신 박물관(Neues Museum)에서 진행하고 있는 뮬카타 프로젝트 가이드 투어.
사진: Tabita Hub ©Staatliche Museen Berlin, Museum für Islamische Kunst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난 뒤 박물관과 이민자·난민 공동체 간의 소통 방식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뮬카타를 통해 많은 이들이 박물관을 보다 환영 받는 공간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해당 국가의 풍부한 문화적 이야기를 담은 유물을 선보이는 전시를 자국 언어(초기에는 아랍어, 2019년부터는 페르시아어 추가)로 설명하는 가이드 투어는 새로운 방식의 박물관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같은 문화권 출신의 가이드가 안내하는 이 투어를 통해 관람객들은 깊은 공감과 연결을 느낄 수 있었고 박물관은 새로운 관람층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도슨트 투어에서 나아가 관람객과 문화·역사적 대화를 촉진하는 접근 방식이 박물관의 전시 기획이나 해석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관람객의 시선을 중심으로 박물관의 전시 자체를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은 투어의 구성과 방향을 새롭게 상상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합니다. 뮬카타에서 제공하는 투어 프로그램은 상호작용과 대화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관람객이 본인의 경험과 관점, 지식을 적극적으로 나누도록 권장합니다. 이러한 참여는 가이드 투어의 흐름과 전시물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보다 의미 있는 전시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 간의 소통과 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데 있어 박물관과 문화 기관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박물관과 문화 기관은 문화 다양성을 증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의 유형 유산과 무형 유산을 소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적 서사를 공유하고 상호문화적 대화를 촉진하며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공동체를 연결하는 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뮬카타는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문화 유산을 탐구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경험을 제공한다.
사진: Maximilian Gödecke ©Staatliche Museen Berlin, Museum für Islamische Kunst
고대 근동 박물관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뮬카타는 인종과 출신,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열린
뮤지엄 가이드 투어를 제공한다. 사진: Anita Back©Staatliche Museen Berlin, Museum für Islamische Kunst
뮬카타는 이제 베를린뿐 아니라 다양한 도시와 문화권에서도 실행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주한 주요 도전과 배운 점은 무엇인가요?
2019년에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위스, 스페인, 그리스에 있는 29개 박물관으로 구성된 뮬카타 인터네셔널 네트워크(Multaka International Network)가 형성되었습니다. 각기 다른 국가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로젝트 간의 긴밀한 연결을 구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매달 온라인으로 정기 회의를 열어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협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아테네와 옥스퍼드에서 열린 특별 행사에서는 각 프로젝트 팀원들이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각 박물관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뮬카타의 접근 방식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그 핵심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마다 예산 규모와 지원 기관이 달라서 재정적인 여건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고 박물관, 대학, 정부 기관 등 서로 다른 행정 체계 안에서 일해야 하기에 유연한 대응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뮬카타의 철학에 맞춰 조율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한국은 세대, 계층, 문화 간 단절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인구 감소가 두드러지는 공업, 농촌 지역에서 새로운 다문화가족 구조가 형성되고 도시-농촌, 세대 간, 토착민-이주민 간의 괴리도 엿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을 귀띔해 주신다면?
제가 경험한 바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다양성의 가치를 중점에 둔 프로그램이나 워크숍을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인이 자기 편견과 선입견을 마주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함께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접근은 사람들 간의 생각 차이를 줄이고 서로 이해하는 태도를 장려할 수 있습니다.
뮬카타 프로젝트가 앞으로 지향하는 점이나 새롭게 준비 중인 계획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내년을 목표로 학생 단체를 위한 흥미로운 새 프로젝트를 준비 중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베를린 박물관 섬에서 랠리(Rally) 형식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학생들이 각자 자유롭게 다양한 박물관과 역사를 탐방하면서 뮬카타가 제공하는 가이드 개요를 통해 방향성을 얻고 주체적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가 문화 유산과 박물관을 더 가깝고 친숙하게 느끼도록 독려하고자 합니다.
독일 역사 박물관 앞에서 만남을 갖는 모습. 매주 일요일 오후 4시 박물관 로비에서는 아랍어로 박물관을 안내해주는 가이드 투어 뮬카타가 시작된다.
사진: Tabita Hub ©Staatliche Museen Berlin, Museum für Islamische Kunst
인터뷰이 : 샌디 알바리 뮬카타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시리아 출신으로 회계와 재무를 전공하다 베를린으로 건너와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에서 10년째 거주 중이며, 2015년부터 독일 역사 박물관에서 뮬카타의 가이드로 활동하다 2023년 4월부터 프로젝트 코디네이션 팀에서 일한다.
글: 공공디자인 소식지 편집부